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전과, 봉오동 카지노 뽀찌의 비밀과 숨겨진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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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희찬의 역사영화-진실과 거짓
그럼에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영화 덕택에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먼저 봉오동 카지노 뽀찌의 시기와 장소의 배경을 살펴봤다. 그래야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먼저 시점 관련하여, 1920년 6월에 카지노 뽀찌가 일어난 이유는 뭘까? 그 전해에는 비폭력투쟁이라는 3.1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그 대비가 묘했다. 3.1 운동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측면이 있지만 비폭력투쟁으론 독립이 어렵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독려하기 시작했고 봉오동 카지노 뽀찌, 청산리 카지노 뽀찌가 그다음 해에 일어나게 된다. 즉, 우발적이 아닌 준비된 카지노 뽀찌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실마리는 그곳에 한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마을이 아니라 군사기지가 자리 잡은 북간도 지역의 무력항쟁의 본거지였다. 한반도의 청년들이 국경을 건너 카지노 뽀찌에 몰려들었고 독립군에 합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600명 정도의 군인들이 있었고 증언에 의하면 카지노 뽀찌은 산성으로 둘러쳐진 견고한 요새였다고 한다.
이번엔 카지노 뽀찌에 대해서 알아보자. 봉오동 카지노 뽀찌가 있긴 전, 간도지역의 독립군들이 수십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바짝 독이 오른 일본군은 근거지인 봉오동을 섬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일본 정규군과 독립군이 맞섰다. 일본군은 카지노 뽀찌 보고서에서 자국 전사자 1명, 부상자 2명으로 기술했다.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자 120명, 홍범도 장군 등 당시 카지노 뽀찌에 참여한 증언자는 일본군 사상자를 500명 이상으로 봤다.
봉오동 카지노 뽀찌에 참여했던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장소를 이동하다가 같은 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또 한번 카지노 뽀찌를 치렀다. 이후 최운산은 자신의 재산을 다 소진하면서 독립투쟁을 이어갔고 수차례 감옥살이로 인한 고문으로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죽었다. 독립군과 일본군 외에 이 카지노 뽀찌에 참여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의 길 안내와 통역, 그들 편에 서서 밀정 노릇을 한 친일 조선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