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배우는 카지노 슬롯머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자전거를 배우는 카지노 슬롯머신
박후기

파밭에 고꾸라진 카지노 슬롯머신가
파꽃처럼 짧게 쳐올린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카지노 슬롯머신와 함께 일어서는 저녁이었다어린 내가
허리 부러진 대파와 함께
밭고랑에 드러누워
하얗게 웃던 밤중이었다

식구들이 깔깔거리며
대문 밖을 내다볼 때,
입 벌린 대문 깊숙한 곳에 매달린 알전구가
목젖처럼 흔들렸다

카지노 슬롯머신!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지 마세요
카지노 슬롯머신를 태운 자전거처럼,
한쪽으로 기운 살림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환한 파밭의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늘 같은 자리만 맴도는구나,
벗겨진 체인을 끼우고
손으로 페달을 돌리며 카지노 슬롯머신가 말했다

어머니는 허리 부러진 파를
뒤란에 옮겨 심었다
흙 속에 뿌리만 묻은 채
옆으로 누워 잠자는 대파들처럼,
식구들은 옹기종기
한 이불 속에서 대파 같은 다리를 묻고
잠이 들었다

카지노 슬롯머신는 죽을 때까지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자식들은 카지노 슬롯머신보다 많이 배웠지만
카지노 슬롯머신보다 많은 것을 알진 못했다-----------------------------------------------------
박후기 시인이 1968년생이니, 그의 카지노 슬롯머신가 자전거를 배우던 시기는 아마도 1970년대 중후반이나 1980년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먹고살 만한 형편이었다면 자동차 운전을 배웠을 텐데, ‘한쪽으로 기운 살림’처럼 가난한 가장으로서는 자전거를 배우는 일도 버거웠겠습니다.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밭고랑에 곤두박질친 카지노 슬롯머신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카지노 슬롯머신는 파밭에 고꾸라지고도 ‘파꽃처럼 짧게 쳐올린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전거와 함께 일어서는’ 긍정의 화신이었습니다. 평생 노동자로 일했지만 젊어서부터 시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결혼해서 5남매를 키우는 동안에도 집 벽에 좋아하는 시를 여기저기 붙여놓곤 했지요. 집안 전체가 문학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박후기 시인도 어릴 때 벽에 붙은 시를 읽으며 자랐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몇 번씩 반복해 읽고 중얼거렸습니다. 그중 몇 편은 지금도 외울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남자 형제 네 명 중 세 명이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그의 큰형과 셋째 형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왔습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이 되도록 본심에만 오르고 마지막 순간에 늘 미끄러졌습니다.

작품을 보낼 때마다 최종심에 오르내리니까 누가 알아볼까 봐 박홍희라는 실명 대신에 ‘박후기(朴後氣)’라는 필명을 써서 응모했지요. 후기(後氣)란 ‘버티어나가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로 줄곧 박후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본명으로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카지노 슬롯머신는 평택 미군 부대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유년 기억에 미군 부대 기지촌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지노 슬롯머신는 그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미군 부대 격납고에서 추락해 안타까운 생을 마쳤지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들이 문학을 하겠다고 하면 말없이 지지해줬던 카지노 슬롯머신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문학과 삶 속에는 카지노 슬롯머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시 ‘폐광’에서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의 회한을 담아 ‘카지노 슬롯머신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나 뒤가 무너졌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래저래 그의 시에는 어두운 가족 풍경이 많이 등장합니다. 한평생 노동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녹아웃된’ 카지노 슬롯머신와 그 카지노 슬롯머신를 대신해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가는 어머니, 24시간 편의점에서 밤낮 일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열아홉 살짜리 딸…….

그렇게 고되고 상처 많은 일상에서도 그는 하얀 파꽃 같은 희망을 피워 올립니다. ‘이가 깨져 대문 밖에 버려진 종지’에 풀 한 포기가 들어앉은 모습을 보고 ‘때론,/ 흠집도 집이 될 때가 있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격렬비열도’라는 시에서는 ‘격렬과/ 비열 사이// 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고 말하지요. 그의 시처럼 삶은 ‘격렬’이나 ‘비열’ 중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랑’이지요. 그것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열망의 섬으로 인도하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같은 사랑의 힘과 ‘죽을 때까지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던 카지노 슬롯머신의 일생을 통해 마침내 ‘자식들은 아버지보다 많이 배웠지만/ 아버지보다 많은 것을 알진 못했다’는 깨달음을 얻고, 이를 한밤중 대문에 매달린 알전구처럼 환환 빛으로 우리에게 되비춰 줍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