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그러니까 메이지 4년 10월 어느날, 류큐의 배 한척이 나하항을
출발하였다.
청나라에 바칠 공물을 실은 배였다.
이와쿠라를 전권대사로 한 구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기 두달전의 일이었다.
69명이 탄 그 배는 중도에 심한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되었는데, 배가 닿은 곳이 대만 남단이었다.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단주로 몇차례에 걸쳐서 상륙을 했는데, 거친 파도
때문에 세사람이 익사하고 66명은 무사히 뭍에 올랐다.
그러나 그 가운데 54명은 그곳 번민에게 학살을 당하고, 열두사람만 간신히
도망쳐서 청나라 관헌의 보호를 받아 8개월만에 류큐로 귀환할수가 있었다.
살아서 돌아온 그들로부터 류큐에 파견되어 있던 가고시마현의 관원이
자세한 사건 내용을 청취하여 현령인 오야마에게 보고했고, 오야마는 그
사실을 태정관에 상신하면서 이 기회에 대만을 정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보고를 받은 태정관에서는 각의를 열어 그 안건을 논의했는데, 온건론과
강경론으로 의견이 갈리었다.
온건론은 대만이 청나라의 속토이고, 류큐는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지배를
받는 기묘한 위치에 있으니, 류큐인의 사건으로 일본이 나서서 청나라의
속토인 대만을 침범하게 되면 자칫하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강경론은 류큐는 벌써 이백년 전에
사쓰마번이 정벌을 해서 일본의 속토가 되어 있는 터이니, 그곳 주민들이
50여명이나 이유없이 학살을 당했다면 일본으로서는 응당 출병을 해서
번민들을 응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대만을 정벌함으로써 류큐가 명실공히 일본의 속토라는 것을 대외에 천명
하는 일이 되고, 또 국내의 불만 사족들을 무마하는 결과도 된다는 논리
였다.
그 무렵 태정관의 중신 절반가량이 구미사절로 나가 있어서 사이고가
국사를 도맡아 집행해 나가고 있는 터였다.
사이고는 강온 양론에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온건론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국과의 문제가 더 중요하고,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좀 더 두고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사이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보류인 셈이지만, 실은 그 안건을 부결한 것이었다.
(지니 카지노신문 1994년 10월 13일자).
출발하였다.
청나라에 바칠 공물을 실은 배였다.
이와쿠라를 전권대사로 한 구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기 두달전의 일이었다.
69명이 탄 그 배는 중도에 심한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되었는데, 배가 닿은 곳이 대만 남단이었다.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단주로 몇차례에 걸쳐서 상륙을 했는데, 거친 파도
때문에 세사람이 익사하고 66명은 무사히 뭍에 올랐다.
그러나 그 가운데 54명은 그곳 번민에게 학살을 당하고, 열두사람만 간신히
도망쳐서 청나라 관헌의 보호를 받아 8개월만에 류큐로 귀환할수가 있었다.
살아서 돌아온 그들로부터 류큐에 파견되어 있던 가고시마현의 관원이
자세한 사건 내용을 청취하여 현령인 오야마에게 보고했고, 오야마는 그
사실을 태정관에 상신하면서 이 기회에 대만을 정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보고를 받은 태정관에서는 각의를 열어 그 안건을 논의했는데, 온건론과
강경론으로 의견이 갈리었다.
온건론은 대만이 청나라의 속토이고, 류큐는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지배를
받는 기묘한 위치에 있으니, 류큐인의 사건으로 일본이 나서서 청나라의
속토인 대만을 침범하게 되면 자칫하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강경론은 류큐는 벌써 이백년 전에
사쓰마번이 정벌을 해서 일본의 속토가 되어 있는 터이니, 그곳 주민들이
50여명이나 이유없이 학살을 당했다면 일본으로서는 응당 출병을 해서
번민들을 응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대만을 정벌함으로써 류큐가 명실공히 일본의 속토라는 것을 대외에 천명
하는 일이 되고, 또 국내의 불만 사족들을 무마하는 결과도 된다는 논리
였다.
그 무렵 태정관의 중신 절반가량이 구미사절로 나가 있어서 사이고가
국사를 도맡아 집행해 나가고 있는 터였다.
사이고는 강온 양론에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온건론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청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국과의 문제가 더 중요하고,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좀 더 두고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사이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보류인 셈이지만, 실은 그 안건을 부결한 것이었다.
(지니 카지노신문 1994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