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상'(1985).
'군상'(1985).
고암 업 카지노(1904~1989)는 '미술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히는 화가다. 1958년 54세의 나이로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 진출해 현지 미술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당대 최고 화랑이었던 파케티 갤러리의 러브콜을 받으며 계약을 맺었고, 전시를 할 때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 평론가들의 칭송을 받았다. 업 카지노가 파리에 동양미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을 때 수강생이 구름처럼 몰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989년 업 카지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프랑스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어 조의를 표했다.

하지만 업 카지노의 국내 인지도는 국제적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작품세계 전반을 돌아보는 전시도 드물었다. 사연 많은 인생 탓이었다. 업 카지노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아내인 박인경의 주도로 1977년 윤정희·백건우 부부가 납북될 뻔한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었다. 정부는 그의 입국과 국내 전시 및 작품 거래를 한때 금지시키도 했다.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 업 카지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모처럼 열린 업 카지노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전시다. 업 카지노를 기리는 미술관인 대전 업 카지노미술관에서 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60여점의 전시작 중 대부분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라리오뮤지엄, 프랑스 퐁피두 센터, 체르누스키 파리시립 아시아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 빌려온 것. 김지윤 학예연구사는 “업 카지노가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작품과 이후 작품을 골고루 소개하는 전시”라며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작품 4점 등 국내 전시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구성'(1979).
'구성'(1979).
전시장 초입에서는 업 카지노가 수묵으로 화선지에 인간 군상을 그린 ‘군상’(1985)을 비롯한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종이로 싼 캔버스 위에 종이를 찢어서 붙인 ‘무제’(1960), 캔버스에 모래를 붙여 마모된 돌의 질감을 주는 ‘구성’(1963), 1989년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업 카지노 추모전에 전시된 1964년작 ‘구성’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업 카지노의 스케치 모음도 흥미롭다. 외투와 모자를 쓴 서양인이 개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수묵으로 스케치한 ‘파리 사람’(1976)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는 업 카지노가 프랑스 이주 전 그린 한국화 작품들이 관객을 맞는다. 1932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대죽’은 초기 대나무 그림 경향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1950년대 초반 그린 ‘지게꾼들’은 서민과 약자에 대한 업 카지노의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다. 전시 마지막에는 그가 프랑스에서 운영했던 동양미술학교 관련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가 나와 있다.
'지게꾼들'(1940년대 후반).
'지게꾼들'(1940년대 후반).
업 카지노의 시기별 작품세계를 시대별로 충실하게 소개한 전시다. 다만 전시장의 전반적인 조명 밝기가 지나치게 어두운 점이 아쉽다. 미술관 측은 “그림을 빌려준 해외 미술관들이 작품 보존을 위해 조도를 낮춰달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일부 어두운 색감의 작품들은 세부 사항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미술관 천장으로 자연광이 들어온다. 그래서 흐린 날보다 미술관에 볕이 잘 드는 맑은 날 보면 더 좋을 전시다. 전시는 내년 3월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