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사이트 아들은 자신을 그려준다는 아빠에게 도망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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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② 카지노사이트이 살던 창신동 집
카지노사이트 가족의 기적같은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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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곳에 참 많이도 들렸다. 집에서 문방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영등포 시장과 동대문 완구 백화점에서 물건을 해 나르셨다. 마땅한 운반 도구가 없어 머리에 이고서 용품들을 대방동 가게까지 날랐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 나도 어머니의 심부름카지노사이트 이 골목을 자주 들락거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의 주요 거점에 지방카지노사이트 내려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동대문 밖 교통의 요지, 1968년 전차 운행이 폐지되자, 전차의 동대문 종점 옆 차고지였던 이곳에 군산, 경주, 울산 내려가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지금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호텔’이 있는 곳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서울에서 고향카지노사이트 내려갈 때는 모두가 설렌다. 고향에 가면 서울에서 왔다고 맞아주는 사람들에게 볼펜 한 자루라도 주어야 했다. 국민볼펜 모나미 153. 그래서 동대문터미널 부근에 볼펜 장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민가들 틈카지노사이트 연탄 가게, 쌀가게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볼펜과 공책 등 문구시장이 형성되더니 완구류, 펜시 도매상들이 생기게 되어 '동대문 문구 완구 도매 종합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집 왼쪽으로 십자가가 보인다. 카지노사이트이 다녔던 동신교회이다. 집 왼쪽에 천이 있었다면 오른쪽 골목을 지나면 동신교회가 나온다.
1956년에 설립된 교회의 역사로 미루어볼 때 카지노사이트이 이곳에 둥지를 튼 1953년 후, 몇 년 지나 생긴 교회이다. 모태신앙인 카지노사이트은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동신교회를 다녔다.

카지노사이트은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하고 평양에서 살림을 차렸다. 광복 후에는 처가가 있는 금성에서 중학교 미술 선생을 했다. 이곳에서 카지노사이트 부부는 해방 후 혼란기에 민주당 대의원 활동했다. 공산당원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국군이 미군의 도움으로 북진했다. 이때 국군 환영 포스터를 제작한 이력으로 1·4후퇴기, 국군이 밀리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카지노사이트은 청산 대상 1순위의 수배자가 되었다. 38선 인근인 금성과 카지노사이트의 고향인 양구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북한군의 수배를 피해 가족을 남기고 단신으로 내려왔다. 함께 민주당 대의원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고 김복순 여사도 아이들과 시동생 가족을 데리고 월남했다.

이곳에서 카지노사이트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전쟁 통에 누가 그림을 사겠는가? 옥수수와 보리쌀을 배급받아 겨우 끼니를 연명했지만, 가정에는 평화가 흘렀다. 생활이 핀 것은 화방 주인 이승우의 도움으로 미 8군 PX(현재 신세계 백화점)의 초상화부에 들어갔을 때부터이다. 이곳에서 돈을 벌어 1953년 35만 환을 모아 집을 마련했다. 청계천 변에 끝없이 이어졌던 판잣집에 비하면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들의 알콩달콩한 삶은 장녀 박인숙의 글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무료해지면 하모니카를 꺼내 들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뻐꾸기 왈츠'와 '다뉴브강의 잔물결'. 박인숙은 아버지의 '뻐꾸기 왈츠'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독일민요 '다뉴브강의 잔물결'은 동해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의 곡조로 차용된 곡이다. 음악의 정보도 미미하던 시절,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카지노사이트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이 아니라 늘 라디오 전파를 탔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불렀을 것이다. 애잔한 하모니카 소리가 창신동 가난한 이웃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카지노사이트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그림과 가족이다.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가족을 만나 이곳 창신동에서 보금자리를 일궜으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 먹을 조금의 양식과 그림을 그릴 환경이면 족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의 카지노사이트 많이도 남겼다. 자녀는 그의 단골 모델이었다. 고수머리를 한 장난꾸러기 어린이는 장남 박성남이다. 전쟁통에 자녀를 잃은 연유로 해서 혹시 똑같은 일이 생길까 봐 그림으로라도 아들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다. 아들은 아버지 그림이 사람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도망 다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다 앉혀 놓고 몇 시간씩 카지노사이트 그렸다.

그가 얼마나 자녀들을 사랑했는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책 한 권이 귀하던 시절, 부잣집 아이들은 전쟁통에도 그림책을 보며 살았다. 끼니도 잊지 못하는데 무슨 그림책이 있었겠는가. 직접 도화지에 카지노사이트 그려 엮으니 훌륭한 그림책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그림책이 어디에 있을까? 경매장 호가만 따지면 수십억 원의 그림책이다.
창신동 집에는 파란 눈의 손님들도 자주 왔다. 카지노사이트은 지금의 명동 반도 호텔 1층 화랑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도 했다. 반도화랑은 이대원 선생님이 운영하였는데, 화랑에서 손님들이 전시된 그림을 보다가 작가의 다른 그림을 더 보고 싶다면 직접 손님들과 함께 창신동 집까지 왔다. 손님이 마을 어귀까지 오면 아이들은 마루 옆 부엌에 숨죽이고 있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조국의 못난 모습을 거침없이 그렸던 화가를 오히려 외국인 구매자들은 좋아했다. 그림 속 주제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였지만 파란 눈의 갤러리들은 이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중에 주 고객이던 마거릿 밀러 여사는 '한국의 서정을 그만큼 성실히 표현한 작가는 없습니다.'(박인숙 <내 아버지 카지노사이트 삼인, 163p)라고 말하며 카지노사이트의 그림을 많이 구매했다. 창신동 집은 카지노사이트에게는 화실이었고, 가족들에게는 보금자리였으며, 외국인에게는 좋은 작품을 많이 건질 수 있는 갤러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1962년 도시계획에 의해 집 앞에 도로가 나면서 집의 절반을 나라에 내놓아야 했다. 지금처럼 충분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땅 주인은 따로 있었다. 땅 임자가 있는 상태에서 카지노사이트은 집만 소유한 것이다. 땅 주인은 매각을 원했지만 카지노사이트은 입장이 난처했다. 당장 갈 곳도 없었다. 소송까지 갔지만 카지노사이트의 패배로 끝났다.
결국 땅 주인이 집 철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1963년에 전농동카지노사이트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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