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에 있다고 가벼이 여길 존재는 아니다. 우리가 딛고 선 땅 얘기다. 땅은 많은 문명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모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넓게는 근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 작게는 개인의 소유를 경계 짓는 단위다. 디지털 사회의 땅은 메타버스와 가상현실(VR) 등으로 물질적인 경계마저 뛰어넘고 있다.
서울 논현동 서정아트센터에서 열린 '땅, 소비되는 신화'는 두 작가가 해석한 땅의 의미를 비교해 보인다. 전시된 회화 17점이 각각 누구 작품인지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오다교(33)는 생태주의적 화풍으로 현재의 땅을, 송지윤(44)은 초현실적인 구성으로 과거와 미래의 땅을 그린다.
오 작가는 흙과 모래, 숯 등 자연에서 구한 소재로 그린 신작 회화를 선보였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계열로 칠해진 캔버스 위에 녹색과 황색의 입자들을 흩뿌렸다. 이끼가 뒤덮은 암석이나 유기물이 켜켜이 쌓인 동굴을 연상케도 한다. 모래와 흙을 안료와 섞고,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를 반죽해 벽화처럼 칠한 작품이다.
송지윤, 오다교 작가의 2인전 '땅, 소비되는 신화' 전시 전경 /서정아트센터 제공내성적인 작가의 주요 일과는 산책과 사색이다. 이번 신작들도 장마가 한 차례 휩쓸고 간 아스팔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제목은 '리플렉티브'. 우리말로 '반사하는'과 '성찰하는'이란 중의적인 단어다. 작가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청아한 풍경 이면에는 전날의 수해가 있었을 것"이라며 "일시적이고 유한한 풍경을 담았다"고 말했다.
흙에서 태어난 것들은 흙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서 자연의 순환을 떠올린다고 한다. 쉴 새 없이 미세하게 변하는 흙을 관찰하는 작가는 현재의 한 순간을 포착한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매번 조금씩 다릅니다. 지금 바라보는 것이 마지막 시대, 마지막 자연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립니다."
송지윤, 'Landscape With Orange Air'(2024) /서정아트센터 제공송 작가가 땅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는 보다 추상적이다. 흙과 모래 등 자연물로서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되는 '공간'의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풍경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데 무게를 두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 사막의 식생, 기암괴석이 뒤섞인 비현실적인 구도가 엿보인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절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의 대면 접촉이 어려워지자 메타버스 등 낯선 개념의 '땅'이 출현했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넘어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느낀 작가는 미래 시대의 땅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전시장 1층에 나란히 놓인 두 점의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모험담의 이름을 본떠 '오디세이'란 제목이 붙었다. 비슷한 구도지만 서로 다르다. 과거를 상징하는 풍경화는 황동 빛 노을이 지고 있는 황혼의 배경이 돋보인다.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어스름 새벽의 풍경과 대조된다.
가상 공간 등 앞으로 도래할 땅의 개념이 마냥 안정적이진 않다. 전시장 2층에 놓인 '뉴 그라운드(New Ground)'의 배경색은 컴퓨터의 오류를 상징하는 블루스크린에 착안했다. 메마른 사막 같은 공간에는 개별 인간을 상징하는 몇 조각의 광물이 놓여 있다. 작가는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가상 공간의 이미지"라며 "그 안에 떠도는 인간들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