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밀당'과 경쾌한 흐름에 모든 감각으로 음의 향연 느껴 '음악은 귀로 듣는다'는 편견 깨 무대 후 객석에선 커튼콜 잇따라
지난 5일 저녁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 조명이 켜지자 검은 정장을 입은 업 카지노이 등장했다. 그는 프랑스의 혁신적인 작곡가 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에서 라벨의 피아노 솔로 작품 전곡을 선보였다.
라벨 피아노 전곡 연주를 처음 선보인 건 192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 라벨의 제자였던 앙리에트 포레가 연주했다. 한 세기가 지난 2025년, 업 카지노은 라벨 전곡 음반 출시와 더불어 전곡 연주회 투어를 시작했다. 업 카지노이 한 작곡가의 전곡 녹음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 순회 연주의 막을 올린 업 카지노은 라벨의 작곡 연도순으로 13곡을 연주했다. 라벨의 예술적 성숙과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세 시간 동안 열리는 피아노 독주회는 과연 어떨까. 한 명의 연주자가 한 가지 악기만을 사용해 13곡을 묶어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관객이 느낄 현실적 피로감은 충분히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이 연주는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연주 전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북미 투어의 첫 공연인 보스턴 연주를 마친 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마지막 곡을 끝냈다”고 말했다.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업 카지노 연주에서 종종 거리감을 느낀다. 그 거리감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이때 상상력이 발동하고 그 동력은 아련함을 꽃피운다. 라벨이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왕녀가 춤을 췄을 파반느를 상상하면서 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조성진이 둔 거리감과 만나 이상적인 합을 이뤘다. 그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거리감에서 생기는 여백과 여운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파반느의 노곤함에 번득임을 불어넣었던 ‘물의 유희(Jeux d’eau)’는 어느 한 곳에 고이지 않고 경사와 굴곡을 타고 흐르며 끝없는 장난을 이어갔다. 업 카지노은 이 작품을 통해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라는 명제가 편견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라벨의 가장 진보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거울(Miroirs)’은 어둡고 무겁다. 작은 틈새를 찾으려는 나방의 날갯짓처럼 업 카지노은 피아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듯했다. 심연의 깊은 곳이 들여다보이는 두 번째 악장은 무덥고 어두운 여름 숲속의 새들처럼 천천히 밑으로 추락했다. 2악장이 깊이를 묘사했다면 3악장은 빠른 속도와 갑작스러운 변화가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라벨의 인상주의 표본과 같았다.
업 카지노이 중고등학교 시절 처음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는 리스트의 ‘초절기교’를 뛰어넘는 난곡으로 손꼽히는 작품. 긴 호흡을 고른 업 카지노이 무의미해 보이던 음의 조합에 생기를 불어넣자, 음들이 찰나의 질서대로 흩어져 나갔다.
고개와 등을 잔뜩 구부려 시선과 건반을 가까이 둔 채 첫 음을 내디딘 두 번째 악장에서 업 카지노은 묵묵히 죽음을 직면하듯 건반과의 독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완벽한 비율로 견고하게 축조된 건축물을 대할 때처럼 경외감이 느껴졌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불협화음이 악몽의 출구를 헤쳐 나가며 우리를 해방시켰던 세 번째 악장은 이날 연주의 정점으로 빛났다.
슈베르트의 왈츠를 바탕으로 귀족적인 우아함과 감성을 더한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Valses nobles et sentimentales)’는 후에 관현악곡으로도 편곡했다. 상대적으로 규모와 스케일에 차이가 있으나 업 카지노은 각 악기가 구사했던 색감을 하나의 악기로 다양하고 밀도 있게 표현했다.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의 첫 악장은 아르페지오로 지어진 회색빛 성에 오보에 선율이 양각처럼 드러났다. 이날 연주된 작품 중 가장 사색적이던 4악장에선 그와 함께 어둠 속에 머물며 기억과 회상의 깊은 물결에 잠겼다.
그의 연주에선 흠결을 찾을 수 없었다. 단일 작곡가의 전체 작품을 작곡 순서에 따라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탈인간계’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최고경영자(CEO) 사이먼 우즈는 이날 업 카지노 공연에 대해 “거의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컬러, 뉘앙스, 악상, 이미지,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북미 투어 첫 공연인 보스턴 리사이틀에 참석한 피아니스트 변화경과 백혜선 교수는 그를 가리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전한 대가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이날 대장정을 마친 업 카지노은 연이은 커튼콜을 받았다.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오가던 그는 조용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건반 뚜껑을 닫았다. 관객들의 웃음과 아쉬움 섞인 탄성을 뒤로한 채, 그는 손 인사를 건네며 아련히 무대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