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안은 아이, 눈빛에 맺힌 외로움…카지노 꽁가 그린 모성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프랑스 정통미술로 시작…인상파 합류
독서·사색 등 여성의 '평범한 일상' 그려

'어머니와 아이' 다루며 전성기 시작
부드러운 화풍에 여성의 현실적 고민 담아
메리 카지노 꽁, <벌거벗은 아기를 안고 있는 렌 르페브르(어머니와 아이)>, 1902-1903년, 캔버스에 유채, 68.1×57.3㎝ /우스터미술관 
메리 카지노 꽁(1844~1926)의 그림 ‘벌거벗은 아기를 안고 있는 렌 르페브르’는 지금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 ALT.1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파 특별전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생기 넘치는 아이와 달리 어머니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림에 현실감과 매력을 더합니다. 어머니도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인간이니까요.

단순한 모성(母性)을 넘어 어머니와 아이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카지노 꽁 자신도 여성 화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히 남성이 지배하던 19세기 프랑스 파리 미술계에서 작가로 살아남아 인상주의라는 미술 사조에 여성의 존재를 깊이 새긴, 카지노 꽁의 삶과 작품을 소개합니다.

카지노 꽁, 화가가 되다

메리 카지노 꽁(위부터), ‘여름철’(1894). /테라재단 소장, ‘침대에서의 아침’(1897). /헌팅턴라이브러리 소장
카지노 꽁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유럽으로 자주 해외여행을 다녔고, 그곳에서 마주한 예술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세계 문화의 중심이 유럽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다른 부잣집 딸들과 함께 받는 미술 수업의 수준은 그에게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카지노 꽁는 스물한 살 때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파리로 유학을 다녀오고 싶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유학?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화가가 된답시고 유럽에 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 하지만 카지노 꽁는 끈질기게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결혼을 선택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지금 사랑하는 건 미술이라고요.” 어머니도 거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재능이 있어요. 좋아하는 걸 시켜줍시다.” 성화에 못 이긴 아버지는 카지노 꽁의 유학을 허락하며 생각했습니다. ‘저러다 말겠지 뭐.’파리에서 카지노 꽁는 당대 최고 초상화 작가인 장레옹 제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재능은 확실했습니다. 프랑스 최고 권위 전시인 살롱에서 1868년 평론가에게 호평을 받아 작품을 선보이며 유망주로 인정받은 게 그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카지노 꽁의 이런 성취를 필라델피아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되지 않았니. 자리를 잡고 정착하거라. 여자는 결국 가정을 가져야 해.”

카지노 꽁는 대답했습니다. “아뇨, 저는 다시 파리로 돌아갈 거예요.” 아버지는 선언했습니다. “여행이라면 몰라도 그림을 그리러 간다면 한 푼도 줄 수 없어.” 카지노 꽁는 작품을 팔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무명 작가였던 카지노 꽁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카지노 꽁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마 파리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림은 이제 그만두고 취업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그는 취집(취업으로서 결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그를 눈여겨보던 수집가가 그림 작업을 맡기면서 카지노 꽁는 유럽으로 갈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을 그리다

파리로 돌아간 카지노 꽁는 스물여덟 살이던 1872년부터 프랑스 미술계의 인정을 받습니다. 반면 카지노 꽁의 마음 한편에는 고리타분한 ‘프랑스 정통 미술’에 회의감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실력이 쌓이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전통적 미술의 한계를 깨달은 겁니다.

카지노 꽁가 인상주의를 만난 건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중 카지노 꽁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에드가 드가. 훗날 카지노 꽁는 드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기억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길을 걷다 창문 너머로 드가의 작품이 보였다. 작품에 푹 빠져 창문에 코를 대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 경험은 내 인생을 바꿔놨다.”

드가 역시 카지노 꽁의 실력을 인정했고 그를 인상파 모임에 끌어들였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조금 까칠하지만 유머러스하고 심지가 굳으며 생각이 열린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카지노 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인상파 그룹에 금세 녹아들었습니다.무엇보다도 인상주의는 카지노 꽁에게 꼭 맞는 옷이었습니다. 인상주의 특유의 밝은 색채는 그의 그림에서 활짝 꽃을 피웠고, 밖에 나가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방식에 익숙해지며 다소 딱딱하다는 평가를 받던 화풍도 부드러움을 갖춥니다. 평생 친구가 된 드가의 개인적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카지노 꽁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특히 그가 그린 여성 인물화는 “다른 화가의 그림에 없는 신선함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카지노 꽁의 그림에는 여성을 향한 존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남성 화가가 그린 여성은 아름다움, 성적 매력이나 유혹, 신비로움처럼 무언가를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카지노 꽁는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습니다. 신문을 읽는 여성, 마차를 모는 여성, 진지한 사색에 잠긴 여성…. 그림 속 그녀들은 지성을 갖춘 독립적 인간이었습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요.

어머니와 아이

사랑보다 직업을 택했지만 카지노 꽁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가 없는 걸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카지노 꽁는 ‘어머니와 아이’라는 소재를 즐겨 다뤘습니다. 그림을 그릴수록 붓 끝은 전보다 부드러워지고 색채는 따뜻해졌습니다. 젊은 어머니의 사랑과 불안이 섞인 몸짓, 아이들의 장난기와 포근한 몸짓을 카지노 꽁만큼 아름답고 생생하게 담아낸 화가는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이 그림들로 카지노 꽁는 세계적인 인기 작가 자리에 올랐습니다.

1926년 82세의 나이로 카지노 꽁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은 물론이고 전 유럽 언론이 그를 추모하며 부고 기사를 실었습니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카지노 꽁의 작품은 여전히 관람객의 발길을 멈춰 세웁니다.만약 카지노 꽁의 작품이 단순히 모성애를 권장하고 찬미하는 그림이었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화풍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그의 작품에는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피로해하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현실성이 그의 작품에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철저한 남성 위주 사회, 남성 위주 예술계에서 살아남아 위대한 예술가로 이름을 남긴 카지노 꽁였기에 표현할 수 있는 주제였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