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천재라더니"…'20억짜리 외제차' 산 청년의 몰락 [성수영의 그때 그 카지노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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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전시 중인
베르나르 카지노 필립(1928~1999)
천재 화가냐, 그저 그런 화가냐
그것이 문제로다
베르나르 카지노 필립(1928~1999)
천재 화가냐, 그저 그런 화가냐
그것이 문제로다

최고의 인기 화가였던 그 남자의 사진이 공개되자 카지노 필립은 술렁였습니다. 상상했던 예술가의 모습과 잡지에 실린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거든요.예술밖에 모르는 가난뱅이 청년인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왕자님처럼 살고 있다니.사람들은 말카지노 필립. “이런 위선자에게 그동안 우리가 속고 있었어!”
20대의 나이로 ‘피카소의 라이벌’,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불리던 화가베르나르 카지노 필립(1928~1999). 그의 몰락은 이렇게 1956년 2월 4일 발간된 <파리 마치 잡지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

가난한 천재
카지노 필립의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 없는 바람둥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늘 우울했습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집안에는, 그래서 자주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갖고 태어난 카지노 필립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지노 필립의 천재적인 재능이 싹을 틔운 건 이 시기였습니다. 추위를 피해 루브르 박물관의 난방 통풍구에서 몸을 녹이던 카지노 필립는 여러 명화를 접하고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카지노 필립의 중학교 선생님이 그 재능을 알아봤습니다.“너는 신동이야. 너는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 추천서를 써줄 테니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에 가서 미술을 배우려무나.”
연합국의 반격으로 독일이 파리에서 물러난 1944년, 열여섯 살의 카지노 필립는 그렇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의 선생님도 카지노 필립의 그림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 후에는 네가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하지만 카지노 필립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뛰어나서였습니다. “배우고 싶은 게 없어요. 저 혼자 그리겠습니다.” 1년 만에 그는 학교를 중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좁고 더러운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훗날 비평가들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카지노 필립의 영혼은 너무나도 예민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도 그에게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카지노 필립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런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그에게 있어 배고픔을 채우려는 본능, 중독자가 약을 갈망하는 충동과도 같았다.”

시대가 기다려온 슈퍼스타
카지노 필립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당시 시대 상황과 카지노 필립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카지노 필립의 작품은 암울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거친 선, 우울한 색채에는 독일 점령기 프랑스 사람들이 겪었던 비참함과 추위, 억압과 비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 소박한 선으로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에는 왠지 모를 존엄과 품위가 있었습니다. 카지노 필립의 그림에서 프랑스인들은 힘든 시기를 꿋꿋이 살아낸 후 폐허 속에서 삶을 다시 일으키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시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카지노 필립는 이 시대의 대변인이야.”
마치 온 세상이 카지노 필립의 성공을 돕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카지노 필립라는 사람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카지노 필립가 파리 미술계에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했을 때 마침 미술시장이 대호황을 맞은 게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기술의 발전마저 카지노 필립를 도왔습니다. 유럽에서는 당시 텔레비전의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병약한 천재 예술가의 면모를 가진 미남 카지노 필립는, 이런 텔레비전 시대의 ‘스타 화가’가 되기에 딱 적합했습니다.
그렇게 카지노 필립의 작품은 서서히 상류층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류층의 저녁 자리에서는 카지노 필립의 작품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예술을 좀 아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들도 앞다퉈 카지노 필립의 작품을 사 갔습니다.

그러니 카지노 필립가 엄청난 부자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카지노 필립는 남프랑스의 성을 구입해 그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길을 걸을 때마다 몰려드는 사인 요청 등 파리에서 치르는 유명세에 지쳐서였습니다. 그리고 카지노 필립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그 성을 채웠습니다.
서른살이던 1958년, 카지노 필립는 아나벨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머지않아 둘은 달콤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여론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그는 눈치채지 못카지노 필립.

롤스로이스가 뭐길래
“예술가는 부자가 되면 안 되나요?” 요즘 카지노 필립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왜 안되냐”는 반응이 많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예술가’로 이름난 제프 쿤스는 부동산과 미술품을 비롯해 수천억원에 달하는 자산을 갖고 있는 부자로 유명합니다. 영국의 유명 현대 예술가 데이미언 허스트는 아예 직접 부동산 개발업에 손을 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분위기에서 이런 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 잘 팔려서 돈을 버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예술가가 돈 자랑을 하는 건 절대로 안될 일이었습니다.1956년 잡지에 나온 카지노 필립의 사진은 이런 금기를 정면으로 건드렸습니다.당시 사진에서 카지노 필립는 운전사가 딸린 은회색의 롤스로이스 실버 레이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차의 가치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원 가량.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 유럽이 카지노 필립의 얘기로 떠들썩해졌습니다. 당시 고급 자동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사치품이었거든요. 각국 언론은 그를 ‘일주일에 4만파운드(현재 가치로 60억원)를 버는 남자’(타임) ‘붓으로 지폐를 찍어내는 청년’(파리 마치) ‘황금 팔을 가진 남자’(슈피겔)라고 불렀습니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이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성에 살면서 원숭이를 키우고, 롤스로이스를 타면서 그런 그림을 그려? 진정성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잖아.” 카지노 필립에 대한 평가와 그의 명성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운도 겹쳤습니다.미술계의 대세가 카지노 필립의 작품 같은 구상미술(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미술)에서 추상미술로 급격히 기운 겁니다.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갓 문화부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가 1959년 “진정한 미술은 추상미술”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게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런 영향으로 카지노 필립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럽의 제대로 된 미술관들은 그의 전시를 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지노 필립의 이런 행보는 비평가와 동료 예술가들에게 경멸을 받았습니다. 한 비평가는 말했습니다. “카지노 필립의 슬픈 광대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치과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이다. 치과마다 그의 작품이 붙어있으니까.”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카지노 필립는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증권거래소 벽의 렘브란트, 대기실의 라파엘로, 촌뜨기 티치아노로.” 다른 비평가는 말했습니다.“카지노 필립가 20대에 죽었더라면 너무 일찍 죽은 젊은 위대한 천재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위대한 화가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자신을 불태워 빛을 내는 유성처럼, 곧 꺼질 듯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천재. 전쟁의 고난과 위기를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이 시대의 작가 카지노 필립는, 어느새 미술계에서 ‘형편없는 저속한 화가’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좋은 화가? 나쁜 화가?
10년간의 전성기 이후 카지노 필립의 삶에 대해 할 얘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카지노 필립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돈은 여전히 많이 벌었습니다. 미술계의 혹평도 여전했습니다.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고 때로는 인상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했지만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1999년 7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카지노 필립를 잊었습니다. 마치 그런 작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듯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 카지노 필립는 평생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을 뿐입니다.그런 그를 세상은 저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가 가혹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세상을 떠난 후엔 또 새로운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이런 상황을 보고 있자면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카지노 필립가 ‘가난한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10년 동안 천재로 불린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광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카지노 필립는 위대한 화가인가요, 평범한 화가인가요?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Bernard Buffet: The Invention of the Modern Mega-artist’(Nicholas Foulkes 지음)를 중심으로 'Bernard Buffet: La Tourmente'(Yann le Pichon 지음), 'Bernard Buffet: The Retrospective'(Sylvie Buisson , Galerie Maurice Garnier 지음) 등을 참조카지노 필립.
<그때 그 카지노 필립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카지노 필립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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