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쇠 파이프를 들고 수산시장을 가로질러 간다. 남자는 시장 안에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을 향해 쇠 파이프를 휘두른다. 난투극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돼 어디에선가 또 다른 남자들이 곤충 떼처럼 몰려온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이제는 십수 명의 무리가 되어 버린 남자들과 상대해야 한다. 남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러나 남자는 칼과 각목을 들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남자들을 능숙하게 때려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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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니 카지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곧 개봉을 앞둔 영화, <지니 카지노은 <양치기들로 독립영화에서 일대 전설로 부상한 김진황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2016년 개봉했던 <양치기들은 들꽃영화상, 춘사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 유수 영화제의 주요 부문을 휩쓸었던 작품이다.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박종환 배우 역시 이 작품으로 2017년 들꽃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독립영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양치기들이 군대 폭력으로 인한 살인 사건의 배후를 쫓는 이야기를 그린다면, 이번 <지니 카지노은 동생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치는 전직 중간보스의 여정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지니 카지노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은퇴해 나름 (비루하지만) 합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전직 조폭, ‘민태’(하정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하나뿐인 동생, ‘석태’(박종환) 와 그의 아내, ‘문영’(유다인) 에게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는 등 민태는 출소 후의 새로운 삶에 조금씩 적응하는 중이다. 그러나 지하 세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던 형제에게 평범한 일상 같은 것은 애초부터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형에게 다급한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린 석태는 결국 시체가 돼 돌아오고, 그의 아내 문영까지도 사라진다. 가장 의아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문영이 다니던 문화센터의 강사였던 작가, ‘호령’(김남길)의 소설 ‘야행’에 모두 예고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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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니 카지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지니 카지노의 중심 사건, 즉 석태의 죽음에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로 민태가 지목하는 인물은 모두 세 명이다. 첫 번째는 자취를 감춰버린 석태의 아내 문영, 두 번째는 자신의 작품으로 살인을 예언했던 호령, 마지막은 민태와 석태가 몸담았던 조직의 보스 창모다. 영화는 이 인물들을 하나씩 추적하는 민태의 시점으로 사건의 윤곽을 드러낸다. 동시에 사건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는 인물들 역시 세 명(그룹)이다. 첫째는 민태, 둘째는 호령, 그리고 세 번째는 경찰이다 (이 가운데 경찰은 애초부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등장해 사족 같은 존재로 비춰진다).
따라서 호령은 지니 카지노의 초반부터 민태가 추적하는 ‘용의자’ 리스트로부터 제외된다. 문제는 이 지니 카지노의 중심 전제 (마케팅에서 중점적으로 어필하고 있는)가 ‘소설에 예고된 살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인물은 호령이어야 했고, 적어도 그는 사라져 버린 문영과 평범한 관계 (어떤 형태로든) 이상의 어떤 것을 공유해야 마땅하다. 유력한 단서와 비밀을 소실한 지니 카지노는 결과적으로 러닝 타임의 초반부터 동력을 잃는다. 호령을 제외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아내와 창모가 남지만, 이 또한 미스터리 지니 카지노의 장르적 관습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너무나도 쉽게 범인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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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니 카지노 속 문영과 창모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지니 카지노은 <양치기들과 이야기적 설정 면에서 몇 가지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전작에서 그랬듯, 주인공은 의문의 살인 사건을 경찰의 추적과는 무관하게 파헤쳐야 할 명분을 가진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안타까운 진실을 마주하기도 하고, 반전을 가진 악당과 싸우기도 한다. <양치기들이 드러냈던 살인 사건의 배후는 치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의 현시를 포착하는 가볍지 않은 이슈였다.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주인공이 어떻게든, 혹은 어쨌거나 나름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역시 그렇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비슷한 여정을 따르면서도 <지니 카지노의 민태는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고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가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사건의 배후 역시 지하 세계의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다.
[위] 영화 <양치기들 스틸컷 [아래] 영화 <지니 카지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물론 <지니 카지노은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르, 그리고 산업의 영화다. 전자가 사회성이 짙은 독립 영화였다면 후자는 장르 영화의 외형을 따르는 상업 영화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이 주력하는 장르적 시도는 이야기적으로도 캐릭터 면에서도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허무한 클리셰만 반복하는데 머문다. 90년대 조폭 영화의 한 장면을 서술하는 듯한 이 글의 서두가 바로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작지만 뛰어난 데뷔작으로 전설이 되었던 작가 감독이 훨씬 더 많은 자본과 큰 제작사를 통해 만든 작품이 이 정도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분명 아쉽다. 그런데도 김진황 감독의 저력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의 전작 <양치기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수작이었다. 그는 이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본질을 가진 이야기로 귀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