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교향곡은 대부분 카지노리거.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혔다. 그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오직 음악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드미트리 카지노리거(1906∼1975).20세기를 대표하는 구(舊)소련 출신의 작곡가 드미트리 카지노리거(1906∼1975)가 남긴 말이다.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 치하에서 유배되거나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그를 두고 세간의 평은 극명히 갈린다. 일각에선 여전히 "권력의 힘에 굴복해 선전용 작품으로 손을 더럽힌 '어용 음악가'"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요즘엔 "악보 곳곳에 반(反) 스탈린 메시지를 새겨넣은 '저항의 작곡가'"로 보는 시각에 더 힘이 실린다.
<증언,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등 그의 삶을 다룬 서적들을 통해 탄압의 시대에서 끊임없이 고뇌했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한 예술가로서의 얼굴이 집중 조명되면서다. 권력자들이 ‘사회주의의 승리’로 임의 해석한 교향곡 5번 피날레를 두고 지인에게 “군중이 몽둥이로 맞고 부들부들 떨며 시키는 대로 중얼거리며 행진하는 모습과 같다”고 작곡 의도를 설명한 일화, 스스로 “용기가 없는 비겁자”라고 자조한 대목 등이 상세히 기록돼있다.
혼돈의 시대를 살다 간 비운의 천재 카지노리거. 올해 카지노리거 서거 50주기를 맞아 그의 작품들이 연중 내내 연주된다. 국내에서 그의 음악을 가장 다채롭게 접할 수 있는 자리는 오는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리는 롯데콘서트홀의 여름 음악제 ‘클래식 레볼루션’이다. ‘스펙트럼: 바흐에서 카지노리거까지’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에선 카지노리거 교향곡 4번, 6번, 15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첼로 협주곡 2번이 연주된다. 이외에도 카지노리거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비올라 소나타, 피아노 5중주 등을 무대에 올린다.
올해 음악제의 예술감독을 맡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는 앞서 기자간담회에서 “소련 체제로 인한 우울함일 수도,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불행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카지노리거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대변하는 음악을 쓴 작곡가”라며 “그와 바흐의 음악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현시대의 사회 문제를 극복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역사에서 ‘피의 일요일’로 기록된 1905년 혁명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인 카지노리거 교향곡 11번 ‘1905년’은 올해 국내 오케스트라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다. KBS교향악단은 오는 11월 2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이 작품을 연주한다. 미국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지낸 명장 레너드 슬래트킨이 포디엄에 오른다. 국립심포니는 오는 12월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카지노리거 교향곡 11번을 들려준다.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부지휘자(2019~2023) 등을 지낸 차세대 마에스트라 안나 라키티나가 지휘봉을 잡는다.
4월 1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교향악축제’에선 카지노리거 교향곡 1번(9일·청주시향), 교향곡 10번(1일·창원시향), 교향곡 11번 ‘1905년’(12일·대전시향) 등이 연주된다.
서울시향은 3월 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실내악 시리즈 공연에서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와 함께 카지노리거 피아노 3중주 2번을 연주하고, 5월 15~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알레나 바예바와 카지노리거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선보인다. 벨기에 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등을 지낸 휴 울프가 지휘봉을 잡는다. 올해 금호아트홀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현악 4중주단 아레테 콰르텟은 오는 9월 카지노리거 현악 4중주 1번을 들려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