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강임술첩’에 수록된 카지노 꽁돈 정선의 ‘우화등선’(왼쪽)과 웅연계람’(1742). /S2A 제공
‘연강임술첩’에 수록된 카지노 꽁돈 정선의 ‘우화등선’(왼쪽)과 웅연계람’(1742). /S2A 제공
18세기 최고 화가 겸재, 19세기 최고 서예가 카지노 꽁돈, 20세기 최고 추상화가 윤형근.

세대를 아우른 필묵의 거장이 한자리에 만났다. 서울 대치동 S2A에서 열리고 있는 ‘필(筆)과 묵(墨), 3인의 거장’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전시다. 겸재 정선(1676~1759)과 카지노 꽁돈 김정희(1786~1856), 윤형근(1928~2007) 등 한반도 수묵을 이끈 이들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S2A는 글로벌세아그룹이 2022년 설립한 전시 공간. 안중근 의사 유묵, 김환기의 ‘우주’ 등 한국 경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카지노 꽁돈’ 전시 전경. /S2A 제공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카지노 꽁돈’ 전시 전경. /S2A 제공
이번 전시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의 기획으로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자의 소장품 40여 점을 한데 모았다. 유 교수는 “겸재와 카지노 꽁돈, 윤형근은 각자의 시대와 방식은 달랐어도 필과 묵의 세계라는 뿌리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세 번의 옥살이로 완성한 검은 기둥

카지노 꽁돈, ‘Umber-Blue’(1977). /ⓒ윤성열 PKM 갤러리 제공
카지노 꽁돈, ‘Umber-Blue’(1977). /ⓒ윤성열 PKM 갤러리 제공
세 사람의 삶을 함축해 보여주는 3점의 작품으로 전시는 시작한다. 조선 소나무의 흐드러진 자태를 보여주는 겸재의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와 카지노 꽁돈가 67세에 쓴 ‘대팽고회(大烹高會)’가 좌우로 마주 보고 있다. 둘 사이에 놓인 그림은 윤형근의 ‘Umber-Blue’(1977).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검은색 기둥이 두 선배 거장의 정신을 연결하는 듯하다.

전시를 오롯이 감상하기 위해선 카지노 꽁돈의 작품부터 살펴볼 것을 권한다. 단색화의 대표 주자인 그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한 작품 세계에 생애 절반을 바쳤다. 하늘의 청다색(Blue)과 땅의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검은색 물감을 큰 붓으로 내려그었다.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을법한 필치에서 옛 선비들의 기개가 엿보인다.

작가는 여러 번 옥고를 치르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4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그는 ‘국대안(국립대설립안) 반대운동’에 참여하며 제적됐다. 이 사건으로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에 끌려가기도 했다. 전쟁 중 피란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73년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을 땐 권력자 자녀의 부정 입학을 따져 물었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맑은 푸른색이 주도한 캔버스에 어두운 색조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번 전시에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작풍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980년대 프랑스 파리 체류 시절 남긴 작품 두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이전까지 주로 린넨에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한지를 캔버스 삼았다. 부드러운 먹 번짐이 여유로운 멋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공간은 64세에 남긴 ‘Burnt Umber’(1992)로 마무리된다. 화면 대부분을 검정이 뒤덮는다. 단순하고 소박한 화면 구성이 작가의 작품 여정에 화룡점정을 찍는 듯하다.

“젊은이여, 카지노 꽁돈체를 흉내 내지 마라”-카지노 꽁돈 김정희

카지노 꽁돈 김정희, ‘묵란(墨蘭)과 제발(題跋)’. /S2A 제공
카지노 꽁돈 김정희, ‘묵란(墨蘭)과 제발(題跋)’. /S2A 제공
윤 화백은 생전에 “나의 붓질의 뿌리는 카지노 꽁돈 김정희에게 있다. 카지노 꽁돈의 필, 정확하게는 획을 긋는 법에서 배웠다”고 했다. 유 교수는 “윤형근은 카지노 꽁돈체에서 영향받은 것이 진심이었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화실엔 카지노 꽁돈의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윤 화백과 카지노 꽁돈의 삶은 닮았다. 여러 번 옥고를 치른 윤 화백처럼 카지노 꽁돈는 11년간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중국의 서법에서 벗어나 독특한 카지노 꽁돈체를 완성했다. 조선 후기 금석학파를 설립할 정도로 조선 비석에 새겨진 옛 문장에 대한 오랜 연구가 밑바탕이 됐다.

카지노 꽁돈의 글씨는 단번에 형성되지 않았다. 24세에 중국 베이징 유학을 다녀온 직후 “지나치게 기름지고 획이 두껍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녀온 뒤에야 남한테 구속받지 않은 개성 있는 서법을 이루게 됐다. 조선의 실학자 박규수는 “그래서 나는 후생 소년들에게 카지노 꽁돈체를 함부로 흉내 내지 마라고 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는 간찰(簡札)과 시고(詩稿), 편액(扁額), 대련(對聯) 등 카지노 꽁돈의 대표적인 작품 양식을 시기별로 엄선했다. 39세에 황주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선 중국의 필체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아있다. 자신을 ‘과천 늙은이’라고 묘사한 70세에 석동에게 보낸 편지에선 필치의 강약 조절 등 조형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가까운 이들과 나눈 편지에는 카지노 꽁돈의 사사로운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먹으로 난초를 그린 ‘묵란(墨蘭)과 제발(題跋)’이 단적인 예다. 작품에 적힌 글귀에 난초를 그리는 비결을 풀어냈다. 그는 “난화는 손을 대기가 가장 어렵다. 근래의 화원으로 단원 김홍도를 가장 높이 치는데, 난초를 한 잎도 그리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카지노 꽁돈 김정희, ‘대팽고회’. /S2A 제공
카지노 꽁돈 김정희, ‘대팽고회’. /S2A 제공
노년에 남긴 두폭 작품 ‘대팽고회’도 눈여겨보자.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경기 과천에 살던 67세 때 작품이다.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을 크게 삶아”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까지 다 모였네”라는 문구가 서로 조응한다. 가족이 한데 모여 식사하는 것에 견줄만한 행복이 어디 있었을까.

팔도를 누비며 찾은 ‘조선의 멋’

겸재는 카지노 꽁돈보다 조금 앞서 ‘조선 산수’의 기틀을 마련했다. 겸재는 한양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아래 살며 늘 앞산을 관찰했고,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며 그 모습을 실감 나게 담았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서울 백운동’ ‘평해 월송정’ ‘낙화암’ 등도 이런 진경산수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연강임술첩’은 그가 양천현령을 지내던 67세에 남긴 작품이다. 1742년 10월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 양천현감 신유한과 뱃놀이를 즐기는 과정을 ‘우화등선’(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다)과 ‘웅연계람’(웅연에 도착해 닻을 내리다) 두 점으로 기록했다.

이 모임은 북송 시대 문인 소동파(1036~1082)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소동파가 임술년에 ‘적벽부’를 만든 것을 기념하고자 60년마다 당대 문사들이 적벽부를 읊조리는 모임을 가진 행사다. 경기도 관찰사와 경기도 관내 최고 시인 신유한, 최고 화가 카지노 꽁돈가 660년 전 소동파를 함께 기린 셈이다. 작품은 임진강을 배경으로 커다란 선박과 수행원 등 행사 진행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그림을 세 벌 그려 각자 나눠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카지노 꽁돈가 그린 그림에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이 더해져 연강임술첩을 구성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이 중에서 카지노 꽁돈가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동산방화랑에 처음 선보인 뒤 약 14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 교수는 “카지노 꽁돈 소장본은 필세가 굳세고 먹의 농담 변화가 강하다”며 “아마도 셋 중 맨 먼저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2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