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북한에서 근대 화가 총람인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을 출간할 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저자 리재현에게 "동무, 지난 시기 창작 공로가 있는 카지노 잭팟 금액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월북화가 카지노 잭팟 금액가 북한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펀람에는 <박연 초상,<송아지 등 카지노 잭팟 금액의 월북 후 작품 4점이 수록되었다.

그러면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 카지노 잭팟 금액가 1998년까지 북한에서도 인정을 못 받았단 말인가? 그는 6·25전쟁 당시 월북하여 활동하다가 1959년 김일성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반종파투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밀려, 친형 이여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한에서 위장병을 앓았다는 것을 보면, 숙청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병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위 천공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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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0년대) / 사진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남한에서 잊혔던 그의 이름이 불린 것은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월북 예술인들을 전격 해금하면서부터였다. 1991년 카지노 잭팟 금액의 작품이 공개된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는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의 작품은 스케일에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압도한다. 카지노 잭팟 금액가 활동했던 1940년대 2미터가 넘는 그림을 그린 화가는 없었다. '역사화'라는 미술 장르는 서양 미술사에서나 거론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민족의 역동적인 모습을 캔버스에 구현하는 화가가 있었는가. 1913년생인 카지노 잭팟 금액(1913~1965)와 비슷한 연배인 김환기(1913년생), 이중섭(1916년생), 박수근(1914년생) 등과 동급으로 국민화가의 반열에 놓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3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카지노 잭팟 금액, 그는 남과 북에서 잊힌 존재였다.

2015년 카지노 잭팟 금액의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다. 해방 70주년을 맞아 열린《거장 카지노 잭팟 금액 해방의 대서사》 전시회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1991년 신세계 미술관에서의 첫 번째 전시가 열리고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아무 생각 없이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일단 규모 면에서 그의 그림에 압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고? 그의 대표작 〈군상1-해방고지(解放告知)〉는 해방의 기쁨을 알린다는 내용의 역사화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해방의 기쁨을 전달하는 여인이 빠르게 뛰어가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일제 강점기 수탈당해 고통스러워하는 남녀의 모습, 사체의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군상1-해방고지 alt=(1948년) / 제공. 한이수">
<군상1-해방고지(1948년) / 제공. 한이수
우리가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의 공이 크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월북. 증오할 겨를도 없이 남편의 이름 석 자가 잊힐까 봐 작품을 꽁꽁 싸서 다락에 보관했다. 아이들도 아버지의 작품이 남아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막힌 삶이 계속되었다. 결혼 패물을 팔아 자식들을 키웠다. 포로수용소에서 수감된 카지노 잭팟 금액는 일찍이 아내에게 작품을 팔아 아이들을 건사하라고 편지했었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한민이, 한식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우리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 .... 무엇보다도 한 푼 없는 당신,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도 돈으로 바꾸어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림이나 화구라도 팔아 가족들 배 주리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건만, 유갑봉 여사는 남편의 작품을 생명처럼 지켰다. 홀로 남아 주렁주렁 달린 자식을 키우는 여사의 마음이 어땠을까? 남편의 이름조차 금기시되어 평생 '월북카지노 잭팟 금액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설움의 눈물을 남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보며 달랬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카지노 잭팟 금액와 유갑봉 / 제공. 한이수
20대 초반의 카지노 잭팟 금액와 유갑봉 / 제공. 한이수
그림, 편지지 등 모든 자료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자료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보여주었다. 1988년 마침내 해금되었지만 이미 유갑봉 여사는 7년 전 타계한 뒤였다. 그의 작품을 공개한 사람은 막내아들 이한우였다. 막내아들 이한우는 1991년 5월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카지노 잭팟 금액의 두툼한 작품 보따리를 김복기 경기대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주요 대작은 액자 틀을 뺀 천 상태로 차곡차곡 포개어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그림 60여 점, 300여 점의 스케치, 기타, 사진, 엽서, 편지 등이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남과 북에서 잊힌 존재 카지노 잭팟 금액의 행적을 쫓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북한에서의 행보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해금되기 전까지 카지노 잭팟 금액는 이〇대나 이**등으로 표기되었다. 이름 자체가 금기시된 마당에 작품이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그런 카지노 잭팟 금액가 서촌에 살았었다. 또 다른 월북화가 최재덕이 카지노 잭팟 금액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가 '경성 궁정정 163번지'로 적혀있다.

"도쿄에 오셨을 때 만나지 못하여 미안하였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제 니카카이 전람회를 살펴보고 반입도 끝을 내었습니다. 올해에는 출품 수가 2점이라서 매우 걱정됩니다. ... 저는 29일 게 귀국하겠습니다. 그러면 또(덕)"

동경에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엽서에서 강하게 배어있다. 나카카이(이과전,二科展)는 일본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미술 전시회이다. 니카카이에 출품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지노 잭팟 금액는 일본 유학 시절, 이과전에 입선한 경력이 있다. 이과전은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文展)의 경직된 운영 방식에 반발하여 1914년부터 새로 생긴 일본의 미술 전시회이다. 후배인 최재덕이 입선 경력이 있는 카지노 잭팟 금액에게 무슨 조언이라도 얻으려 한 것일까?

궁정정(동) 163번지, 지금은 휑한 길로 뚫려 아무런 흔적도 없는 허공과 같은 곳. 1990년대 초 길이 나버려 카지노 잭팟 금액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1941년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잠시 살다가 42년부터 신설동으로 이사 갔다.
카지노 잭팟 금액 집이있던 곳은 도로로 변했다 / 제공. 한이수
카지노 잭팟 금액 집이있던 곳은 도로로 변했다 / 제공. 한이수
그러나 이곳은 아내 유갑봉과도 관계가 깊다. 집터에서 아내가 졸업한 진명여고보는 몇십 미터 이내이다. 유갑봉은 재학 당시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휘문고보 재학 중인 카지노 잭팟 금액와 어떻게 만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첫눈에 갑봉에게 반했다. 당시 카지노 잭팟 금액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 자리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학교가 파하면 진명여고보까지 자주 찾아갔다. 아마도 멀리서 가방을 들고 유갑봉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학교 앞 경복궁 주변이 아니었을까? 진명여고 앞에서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경복궁에 있었던 미술관에서 멋진 전시회를 관람했으려나. 그의 아내 사랑은 너무도 유명하여 작품 속에 유갑봉의 모습이 많이도 그려져 있다. <카드놀이를 하는 부부라는 그림을 보자.
<카드놀이하는 부부 alt=(1930년) / 제공. 한이수">
<카드놀이하는 부부(1930년) / 제공. 한이수
카드가 있는 테이블에 남편과 아내가 카드를 쥔 채 무엇에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응시한다. 아내의 얼굴이 빨갛다. 이유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 때문이다. 이들은 놀이에서 지면 벌주를 마셨을까?

이곳에 둥지를 튼 이유는 그의 형 이여성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촌에 먼저 자리를 잡은 형이 이곳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을까? 이여성은 몽양 여운형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다. 형과 띠동갑 차이가 나는 카지노 잭팟 금액는 누구보다도 형을 존경했다. 카지노 잭팟 금액 월북 이유 중에는 먼저 월북한 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015년 카지노 잭팟 금액의 자화상이 서울의 거리에 나부꼈다. 나부끼는 깃발 속에서 카지노 잭팟 금액가 팔레트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조화롭지 않다. 서양 모자 아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시선은 정면을 응시한다. 자세히 보면 붓은 서예를 그리는 붓이다. 서양화를 그리더라도 민족의 정신은 그림 속에 구현하겠다는 그의 결기가 느껴진다.
<해방의 대서사 거장 이쾌대> 전시 현수막 (2015년 7월 22일부터 11월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기념 전시회) / 제공. 한이수
<해방의 대서사 거장 카지노 잭팟 금액 전시 현수막 (2015년 7월 22일부터 11월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기념 전시회) / 제공. 한이수
남과 북에서 잊힌 화가 카지노 잭팟 금액, 그는 정말 북한이 좋아서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을 택했을까? 물방울 화가 김창열과 함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함께 그림 공부를 한 제자 남경숙은 카지노 잭팟 금액에게 조심스럽게 사상에 대해 질문한 것을 회고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희망이 있다"라고 대답하셨어요. (517페이지) 그러면서 카지노 잭팟 금액는 대중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